봄 경치가 수려하다는 마곡사는 공주에서 예산으로 가는 32번 국도를 타고 가다 사곡에서 사곡로로 빠져서 간다. 사곡을 벗어나면서 금세 산굽이가 이어져 어느새 오지로 들어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길에 실려 흔들리며 가는 맛이 그런대로 즐길 만하다. 입구에서 차를 내려 10여분 걸어가며 느끼게 되는 호젓한 맛은 절집에 들어서도 여전하다. 충청남도의 절들을 이끄는 조계종 31개 본산 중 제 6교구 본사가 이곳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절이 앉은 자리는 택리지나 정감록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명당으로 곱는 곳이다. 조선 숙종 때 사람 송상기는 유 마곡사기에서 "절은 고갯마루 아래에 있었고, 10여리 길가에 푸른 시냇물과 흰 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고 마곡사 주변의 선경을 칭송하였다. 절을 둘러싸고 태극모양의 계류가 휘감아 돌며,두 물줄기가 천왕문 앞에서 만나 흘러내려가니 산벚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치는 볼수록 사람을 끌어당긴다.
614m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태화산 동쪽기슭의 사곡면 운암리에 있는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때에 신라 사람인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시대에 와서 보조국사가 중창하여 크게 일어선 절이다. 절 이름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의 스승인 마곡 보철화상을 기려 이름을 땃다고도 하고, 보조국사가 고려 명종 2년(1172)에 이 절을 재건할때에 경오는 사람들로 골짜기가 꽉 찬 모습이 삼밭에 삼이 선 것과 같아서 붙었다고 한다. 또 하나, 절이 세워지기 전에 마씨성을 지닌 토족이 살았다는 말도 있다. 통일신라 때에도 제법 번창하였으나 나말여초 기간에는 쇠락하였고, 보조국사의 중수로 고려 때에 다시 번창했으나 그 뒤로는 큰번창은 없었던 듯 하다. 많은 절들이 그랬듯이 왜란과 호란 때에 황폐해졌고 1782년에는 큰불이 나 500여 칸의 전각들이 불타 버렸다.그러므로 지금 건물들은 그 뒤인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세운 것들이어서 고찰다운 풍모는 그다지 보여주지 못하는데, 요즈음 들어 새로이 중창불사를 일으키니 그나마 아담했던 맛마저 스러질 듯하여 안타깝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벌여 선 금강역사상과 문수, 보현동자상이 맞아준다. 이문을 지나면서 번뇌와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면 본격적인 절 구역을 뜻한다. 역시 동방지국천왕, 서방광목천왕, 남방증장천왕, 북방다문천왕의 네 천왕이 부처 세계의 문지기로 늠름하게 서 있다. 악귀를 발 밑에
깔고 있고 거대한 크기이나 무섭기보다는 어수룩해 보이는 모습이 조선 후기 소조불로서 모셔진 천왕상들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대개 절들이 초입에 개울을 건너 몸과 마음을 씻게 하고나서 절 영역이 시작되는 것과는 달리 마곡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크게 두 영역으로 나뉜다.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 개울을 건너기 전에 왼쪽으로 들어가는 곳은 영산전 영역이다. 이곳에 명부전과 국사당이 있으니 이쪽은 주로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전각들이 있다. 극락교를 지나 곧장 가면 마곡사의 중심공간인 대광보전의 영역에 이른다. 뒤쪽의 대웅보전은 산지의 좁은 터를 비집고 가파른 돌축대 위에나마 2층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대광보전 서쪽에 있는 종무소 마루에는 하늘을 나는 중생을 구제하는 운판과 물 속에 사는 중생을 구제하는 목어가 걸려있다. 지상의 축생과 중생을 구제하는 법고, 지옥의 중생을 구제하는 범종과 함께 법구사물을 이루는데, 마곡사목어는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아 소박하면서도깊은 맛을 낸다. 심검당과 맞은편에는 16나한을 모신 응진전이 있다.
경내 한가운데의 오층석탑은 길쭉하게 솟아오른데다가 이색적인 상륜을 머리에 이고 있다. 그 앞쪽으로 가지를 옆으로 길게 늘인 향나무 한그루가 있어 눈을 즐겁게 하는데 자못 엄숙한 뜻이 있다. 백멈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범인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1898년에 탈풍하여 마곡사에 은신한 적이 있는데 뒷날 마곡사에 들러 그때를 회상하며 기념하여 심은 나무라고 한다.
이절에는 고려시대인 1388년에 감색 종이에 은박으로 글씨를 쓴 '묘법연화경' 제1권과 제6권이 전해 내려와 각각 보물 제 269호와 제 270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고려 시대의 오동나무 향로도 전해 내려왔는데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