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의 맞은편 쪽에는 아치 모양의 큰 문이 있어 무령왕릉과 송산리고분군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비로소 공주가 백제 수도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성 아래 맞은편 낮은 둔덕에 능을 썼다는 이야기이다.
높이 130m의 나지막한 구릉인 송산에서 이름을 땃기에 예전에는 송산리였지만 지금은 금성동인 이곳에는 구릉 중턱 남쪽 경사면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세 채와 네 채로 갈라져 고분이 모두 일곱 채가 뚜렸이 남아 있다. 동북쪽에 제 1호부터 4호분까지가, 서쪽에 5호와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이 있다. 그밖에도 봉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지하에 많아 사적 제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1호부터 6호까지의 고분들은 모두 일제 시대 때 발굴조사되었다. 1호분부터 5호분까지는 모두 자연할석으로 돌방을 쌓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인데는 강회를 발랐다. 이것은 한성 시대부터 내려오던 백제식 무덤축조 방식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6호분만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네 벽에 진흙과 호분을 바른위에 벽화를 그려 놓아 '송산리 벽화고분'이라고도 부른다. 벽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와 동그랗게 표시한 해와 달, 별들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부여 능산리 고분의 것과 함께 오직 둘뿐인 백제의 벽화이다. 오랜 세월의 습기 때문에 물감이 얼룩얼룩해지고 그림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고구려 벽화 무덤에 그려진 사신도에 견주면 선이 매운 부드럽고 우아해서 역시 백제식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6호분은 벽화로 하여 송산리 고분군의 여왕노릇을 하고 있엇지만, 1971년에 무령왕릉이 밝혀지면서 세인의 관심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으니 마치 쓸쓸한 퇴역배우 같아졌다. 이 6호분은 무령왕릉과 관련지어서 그 전왕인 24대 동성왕릉으로 보기도 하고, 그 후대 왕인 26대 성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4호분까지는 공개하지 않으나 5호분과 6호분은 입구를 공개하니 들여다 볼수 있다.
5호분과 6호분의 뒤쪽에 있는 것이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은 공주가 공주답게 보이게 하는 데에 어느 유물이나 유적보다도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다면 공주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무령왕릉 발견이 당시 학계는 물론 세인들에게도 얼마나 가슴 떨리게 한 놀라운 일이었는지는 김원룡 박사의 발굴 회고담에 잘 나타나 있다. 6호분에 자꾸 물이 드는 것을 막느라고 보수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기에, 많은 다른 고분들과는 달리 도굴되거나 전혀 훼손되지 않은채 처녀분으로 우리에게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 우연치고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무덤의 주인공 무령왕(501~523년 재위)은 백제 제 25대 왕으로 안으로는 정권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일으켰으며 밖으로는 중국 양나라나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백제의 국제적인 위치를 다져 26대 성왕이 백제 중흥을 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다진 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키가 8척이나 되어 훤칠하며 풍모가 준수하였을 뿐 아니라 성품도 인자관후하여 민심이 스스로 와서 따랐다고 한다. 중국 양서에서는 이러한 무령왕대에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고 있으니 성왕대의 문물정비는 이미 무령왕대에 준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뚜렷한 증거가 바로 무령왕릉과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이 무덤은 왕과 왕비의 합장묘로서 왕비가 무령왕보다 3년 뒤인 526년에 돌아가자 마찬가지로 3년상을 치르고 이곳에 함께 묻었다. 무덤 안에는 왕과 왕비가 입구 쪽인 남쪽에 머리를 두고 왕의 관이 동쪽, 왕비의 관이 서족에 놓여 있었다. 시신은 본래 나무관 안에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되면서 관이 무너져 유물들이 많이 흩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시신이나 천은 이미 삭아 없었고 주로 금동제 유물이 남아 있었다.
시신을 안치한 뒤 입구를 벽돌로 막았는데 발굴 도중에 그 가운데에서 任辰年作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이 무덤이 무령왕 통치기긴 512년부터 이미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